2019년 9월 11일 수요일

어느 밤

추석 연휴. 밤이 너무 깊지 않은 통에 도통 잠이 들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연락해 볼까 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애매한 거리감의 여사친에게 보낸 메시지에 결국 삭제 버튼을 누르었다. 밖에 나가볼까 했지만 술을 한잔 마신 덕에 차를 끌고 나가 긴 글렀고 버스를 타자니 택시로 돌아올 것 같았다. 중심가에서 꽤나 떨어진 외진 위치의 평범한 아파트에 자리 잡은 부모님의 거처는 야경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수평선 끝에서 끝까지 출처모를 빛무리들이 매일 밤 반짝였다. 야경에 사로잡힌 아버님은 단박에 구매를 결정하였고 덕분에 생각지 못한 심각한 층간소음에 골머리를 앓았다. 



"띠링" 울리는 전화. 삭제한 메시지에 무심한 질문이 돌아온다. 잠시 고민 후 집을 나선다. 어차피 이렇게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다. 가을장마가 끝난 직후라 그런지 밤바람은 스산했다. 한적한 버스에 몸을 실어 가만히 기대어간다. 요즘 들어 자주 기댄다. 기댈 곳 없는 세상에 홀로 우뚝 서 있노라면 썩은 나무처럼 밑동이 부서져 어디로든 나뒹굴 것 같았다. "어디야?" 집 앞까지 찾아가도 하염없이 늦는 그녀는 미안한 기색 없이 항상 쾌활하다. "가던 데로 가자" 잠시 고민하는 척했지만 행선지는 몇 년째 변하지 않았다. 뜨거운 국물에 소주 한잔 할 수 있는 곳. 갖은 걱정들과 욕망들이 어깨 위에서 머리 위에서 살그머니 내려온다. 



"요즘 뭐하고 지내길래 소식이 없냐" "코타키나발루 다녀왔어" "남자 친구랑?" "아니~ 가족이랑 다녀왔지" "너는 어떻게 매주 여행을 가니. 돈도 많이 못 벌면서. 누가 보면 재벌인 줄 알겠어~" "인생 즐기는 거지 뭐 있니. 그리고 나 그렇게 많이 안가~" "너 지난번에도 어디 다녀왔잖아" "언제?" "지난주엔가? 인스타에 사진 올렸던데". 한잔. 두 잔. "사는 게 지겹고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넌 항상 그래.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봐" "난 나를 위해 일을 하고 싶어. 뭔가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것 같아" "넌 사업을 해야 하는 것 같아. 그래야 좀 행복할 것 같아" "음. 글쎄 꼭 사업이라기 보단 뭔가 주도적인 일을 해야 행복을 느낄 것 같아" "돈 많이 벌면 나 잊지 말구~" "그래. 너 아들 낳으면 내가 꼭 챙길게"



특별한 일이 없기에, 특별한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저 뿌리 깊이 자리 잡은 외로움을 조금 덜어내어 술잔에 섞어본다. 스무 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낸 지 9년.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나를 다시 이따금씩 고향으로 이끈다. 천성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하는 기질이라 유치원 저학년 때에는 일 년 내내 계단에 앉아 홀로 지냈다. 그런 꼬맹이가 스스로의 텃밭을 일구기 위해 꽤나 오래도록 나와있었지만, 자연스레 생긴 향수병을 관계로써 해소하기보단 혼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자라게 되었다.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으로 변하면서 방어태세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말수는 더욱 줄고 생각은 더 많아졌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쉼터였던 술집은 근처에 위치한 성인나이트의 2차 전쟁터로 변했다. 40대가 넘어 보이는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나름의 멋으로 한껏 꾸미고 치근덕거리고 교태를 부린다. "저것 봐 저것 봐. 엄청 늙어 보이는 남자가 저 여자한테 말 걸고 있잖아"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호기심에 눈이 반짝인다. 심각한 인지부조화의 장이 등 뒤에서 시작되기에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결혼과 사랑은 나에게 아직 불가침의 영역이지만 이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난 그들과 다르고 또 부모님은 다를까. 



"잘 가" 총총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본다. 외로움은 또다시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들처럼 나를 에워싸고 천천히 기다린다. 취기가 가시고 정신이 멀쩡해지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 뒷목, 어깨, 허벅지, 발꿈치, 무릎, 팔꿈치를 문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나를 움직인다. 말과 행동을 일반인들보다 느려지고 눈에는 생기가 사라진다. '그으으으' 입에서는 맹수의 그것과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한 걸음씩 발을 뗼 때마다 썩은 내가 진동한다.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사람이 적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깔깔깔" "그랬고 그랬잖아" "진짜?" 왁자지껄 나누는 이야기들에 더욱더 몸을 피한다. 더욱더 숨어 들어간다. 깊을 굴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지렁이처럼 몸을 움직여 간신히 남은 틈을 메운다. 그러곤 눈을 감는다.

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외제차를 샀다

외제차를 샀다. 에스토리칼 블루의 17년식 BMW는 5월의 햇살을 받으며 따사롭게 반짝였다. 살만해서 산 외제차는 아니었다. 하루 8시간 노동에 자유를 박탈당한 나의 꿈과, 결국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나를 현실에 발 디딜 곳 없게 만들었다. 결국 이놈도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을 들여 갚아나가야 할 짐이 될 테지.



들뜬 마음은 4개월 만에 다시 수면 깊이 가라앉았다. 현실로 돌아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내어 바친 돈만큼, 딱 그 정도만 유효했다. 노동은 계속되었다. 대기업 프로그래머로 일한 지 만 3년. 입사 전 그토록 좋아 보였고 다다를 수 없어 보였던 이 직함은 이젠 지긋지긋하게 싫고 역겨워졌다. 앞으로 30년 동안 노동과 젊음의 등가교환은 계속될 것이고 늙고 병들은 몸을 이끌고 이 닭장을 벗어나 대략 30평대 수도권 아파트와 대학 졸업한 아들과 딸이 덜렁 생길 테고, 틈만 나면 부동산 얘기, 돈 얘기, 자식 얘기하는 늙은 와이프가 곁에 남겠지. 평범하고 얼핏 보면 부유해 보이는 삶이지만 그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보였다.



돌아보면 삶이라는 건 늘 밀물과 썰물의 반복이었다. 밀어닥칠 땐 정신없이 그 위치 그 자리라도 지켜보려고 발버둥 쳐 보지만, 빠져나갈 땐 영혼이라도 같이 용해되어 나간 듯 끝없는 공허함이 수면 아래 있던 백사장처럼 고개를 내민다. 그럴 때면 가끔 극단적인 생각도 한다. 이대로 끝이면 어떨까. 이 모든 경쟁, 욕망, 거짓말, 노력, 실패, 인간관계, 집착, 희열 그리고 두통이 거대한 피로감이 되어 코끼리의 발처럼 가슴을 짓무른다.



친구가 빌려준 이상 문학상 전집에 이런 재미난 표현을 쓴 글이 문득 기억났다. 작가의 심장 위에는 항상 코끼리의 발이 올려져 있다. 친구를 만날 때나 산책을 할 때나 잠을 잘 때, 불현듯 코끼리는 잠시 고민 후 발에 힘을 준다. 작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잠을 설치고 길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한다. 고통의 크기는 작은 당구공이었다가 거대한 지구가 되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알 길이 없다.



나에게 고통은 자유의 박탈이고 용기의 부족, 의지의 결여이다. 나로 태어나 나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비통함이다. 현실의 지루함이고 예상되는 모든 시나리오가 5지 선다형이었음을 깨달은 순간이다. 이치에 도통 맞지 않는 세상이며, 그 속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복잡한 핼러윈이다. 버릴 수 없는 몸의 욕망과 속 깊은 부도덕함과 거짓말들이다. 그럼에도 쓰레기 같은 욕망을 애써 감추려는 시도이며 멀쩡한 척 살아가는 내 사지이다.



에스토리칼 블루의 17년식 BMW는 4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잘 나가지만 왠지 모르게 뒷자리에 덜그럭거리는 잡소리가 가끔 나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지만 고요한 밤 심하게 덜컹이는 지면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내 귀를 간지럽힌다. 울화통이 터지 지기보단 잘 못 들은 걸로 치고 넘어간다. 매번 그렇게 넘어간다.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들판


어렸을 땐 고독과 슬픔에 대한 남모를 호기심이 있었다. 나이가 들며 불현듯 생각만 해도 가슴이 얼얼한 그런 기억들이 이따금씩 찾아왔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던 하루하루를 다시 무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도 결국 다시 무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그저 발에 닿는 감촉만으로 내가 앞으로 가고있다고 인지 할 뿐, 스쳐가는 바람 한점 느껴지지 않는 이 곳에서 그저 묵묵히 고통을 견디어 낸다. 인간은 나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어째서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셨나요. 누군가 그랬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맞다. 따라서 즐겁게 살기 위해, 고통을 줄이기 위해 또다른 고통을 견디며 산다. 고통 끝에 잠시 행복이 찾아왔지만, 그 행복은 더 큰 고통을 남기고 떠나간다. 행복이 떠난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너른 광야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해보이는 듯 하다. 바로 여기서 실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우린 누구이며 대체 무엇때문에 이런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가. 목적론에 입각한 이러한 생각은 결론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어리석고 나약하기 때문에 지혜롭고 강인한 것, 바로 목적과 타당성에 손쉽게 이끌린다. 또 그것에 유혹당한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인생의 결론에 다다른다. 수조의 인간들은 무상하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갔다. 그것을 잘 아는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은 다시 글을 쓴다. 현실의 고통과 그것의 타당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 결국 글은 아무것도 이뤄 주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한 줄로 주욱 늘여 쓴 글은 행복이 떠나간 너른 광야를 벗어나려는 어리석은 자의 발자국과 같다. 결국 고통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어렸을 적 느끼지 못했던 실존의 고민은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실마리 삼아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깊어지는 내면에는 썩은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 냄새가 역겨웠지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2019년 1월 20일 일요일

자유의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잘 살고 있는건지, 나는 과연 괜찮은 건지 물어볼 새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 가만히 있으면 괜스레 괴로워서 일부러 더 쉴틈없이 주변을 만든다. 매 순간 욕망에 충실하게 그렇게 허망한 시간을 견디어 낸다. 자아가 생기고부터 알 수 없는 삶의 이유라는 것 때문에 결국 다시 또 밑바닥까지 내려앉는다.


가끔 삶의 이유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성공 혹은 사랑. 조금 더 지나면 아이와 건강을 걱정하겠지. 수 만년 전 부터 우리의 DNA에 적혀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왔다. 단 하루도 그 룰에 벗어난 적 없이 여태 살아왔다. 내게 대체 무엇이 결핍되었길래 이런 삶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 걸까. 몸은 그저 생물적 안위를 위해 끊도없이 움직이는데 마음은 그것에 대한 벗어남을 갈망한다. 이런 모순 또한 인간종이 가지는 특징인가?


주변인들은 그런 의문을 많이들 품지 않아 보인다. 그저 생물의 본성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다들 목적이 아주 명확해 보인다. 그들에게 의문을 품는건 사치이고 쓸데없는 일이다. 그들의 의문은 결국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사색형 인간임을 처음 깨달은 것은 중학교때이다. 전교 성격검사때 밝혀졌는데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성격 유형인지 선생님은 이런 유형을 처음 봤다고 한다. 유형의 이름과 걸맞게 생각을 참 많이 하는 편이다. 아주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의 가설도 혼자 세우는 편이다. 그 중 하나는 자유의지에 관한 가설인데, 자유의지는 말 그대로 어떤 타율에 의하지 않은 스스로 발현되는 의지이다. 근데 이 타율이라는 게 참 애매한데, 학계에서는 이것을 앞서말한 생물학적 안위로 본다. 무슨 말이나 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 이성관계, 안전, 권력 등의 모든 욕망은 결국 타율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 과연 내가 선택한 건 뭘까.


뇌의 시작은 파충류의 뇌로부터 시작한다. 파충류의 뇌를 보면 아주 얇고 작은데, 그 역학은 특별한 것 없이 생명 유지이다. 숨쉬는 것부터 시작해서 체온 유지 등 생명을 유지하는데에 아주 기본적인 역할만을 담당한다. 생물은 수십만년간 진화하면서 그 뇌에 기능들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진화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기능은 이전 기능을 Base로 그저 추가된다. 그 예로는 눈의 기능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눈은 물속에서 진화하여 육지로 올라왔지만 그 때문에 정말 많은 비효율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뇌도 그런 식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에 수많은 모순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인간 종이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대뇌가 급격하게 성장했다. 대뇌는 추상적인 생각을 하는 기능을 한다. 우리가 종교, 회사, 화폐와 같이 거짓인 것을 그토록 잘 믿을 수 있는 이유중 하나이다. 이러한 능력 때문에 우리는 대규모 협력이 가능해지며 결국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내 가설인데, 문제는 결국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피엔스 시대로 접어들며 뇌를 전부 재설계했다면 현재의 자가당착적인 인간의 모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뇌의 Base는 파충류의 뇌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추상적인 생각들의 Base는 결국 생존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게 문제가 되는가? 앞서 말했듯이 모순이 생긴다. 대뇌의 기능은 생존이라는 Base를 벗어나려 함으로써 오히려 생존력을 극대화했다. 하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추상적 사고의 뿌리는 생존이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뿌리깊은 이유 중 하나는 관심을 받기 위해서이다. 몇 번이나 생각을 해봐도 결론은 같았다. 물론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싶기 때문이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아주 유약하고 어리석은 아이의 욕망이다. 이건 나의 예시이지만 자신을 돌아보라.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생각들의 좀 더 근원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당신이 시기질투하는 누군가를 언짢게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토록 어떤 신념을 따르는 이유는? 결국 우리는 우리 안에 작은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인가?


어려운 문제이다. 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선 대조군이 필요하다. 내 가설은 뇌의 생물적 한계 때문에 오는 필연적인 자유의지의 부재이다. 모든 원인은 대뇌 피질을 제외한 모든 뇌의 구성원들이다. 대조군은 결국 대뇌의 피질만이 정상 동작하는 인간일 것이다. 그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하게 될까? 그의 말과 행동, 그가 추구하는 것들은 정말 인간적 욕망이 배제된 추상적 사고들일까? 그는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을 극복한 현자가 될까?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