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차를 샀다. 에스토리칼 블루의 17년식 BMW는 5월의 햇살을 받으며 따사롭게 반짝였다. 살만해서 산 외제차는 아니었다. 하루 8시간 노동에 자유를 박탈당한 나의 꿈과, 결국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나를 현실에 발 디딜 곳 없게 만들었다. 결국 이놈도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을 들여 갚아나가야 할 짐이 될 테지.
들뜬 마음은 4개월 만에 다시 수면 깊이 가라앉았다. 현실로 돌아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내어 바친 돈만큼, 딱 그 정도만 유효했다. 노동은 계속되었다. 대기업 프로그래머로 일한 지 만 3년. 입사 전 그토록 좋아 보였고 다다를 수 없어 보였던 이 직함은 이젠 지긋지긋하게 싫고 역겨워졌다. 앞으로 30년 동안 노동과 젊음의 등가교환은 계속될 것이고 늙고 병들은 몸을 이끌고 이 닭장을 벗어나 대략 30평대 수도권 아파트와 대학 졸업한 아들과 딸이 덜렁 생길 테고, 틈만 나면 부동산 얘기, 돈 얘기, 자식 얘기하는 늙은 와이프가 곁에 남겠지. 평범하고 얼핏 보면 부유해 보이는 삶이지만 그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보였다.
돌아보면 삶이라는 건 늘 밀물과 썰물의 반복이었다. 밀어닥칠 땐 정신없이 그 위치 그 자리라도 지켜보려고 발버둥 쳐 보지만, 빠져나갈 땐 영혼이라도 같이 용해되어 나간 듯 끝없는 공허함이 수면 아래 있던 백사장처럼 고개를 내민다. 그럴 때면 가끔 극단적인 생각도 한다. 이대로 끝이면 어떨까. 이 모든 경쟁, 욕망, 거짓말, 노력, 실패, 인간관계, 집착, 희열 그리고 두통이 거대한 피로감이 되어 코끼리의 발처럼 가슴을 짓무른다.
친구가 빌려준 이상 문학상 전집에 이런 재미난 표현을 쓴 글이 문득 기억났다. 작가의 심장 위에는 항상 코끼리의 발이 올려져 있다. 친구를 만날 때나 산책을 할 때나 잠을 잘 때, 불현듯 코끼리는 잠시 고민 후 발에 힘을 준다. 작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잠을 설치고 길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한다. 고통의 크기는 작은 당구공이었다가 거대한 지구가 되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알 길이 없다.
나에게 고통은 자유의 박탈이고 용기의 부족, 의지의 결여이다. 나로 태어나 나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비통함이다. 현실의 지루함이고 예상되는 모든 시나리오가 5지 선다형이었음을 깨달은 순간이다. 이치에 도통 맞지 않는 세상이며, 그 속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복잡한 핼러윈이다. 버릴 수 없는 몸의 욕망과 속 깊은 부도덕함과 거짓말들이다. 그럼에도 쓰레기 같은 욕망을 애써 감추려는 시도이며 멀쩡한 척 살아가는 내 사지이다.
에스토리칼 블루의 17년식 BMW는 4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잘 나가지만 왠지 모르게 뒷자리에 덜그럭거리는 잡소리가 가끔 나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지만 고요한 밤 심하게 덜컹이는 지면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내 귀를 간지럽힌다. 울화통이 터지 지기보단 잘 못 들은 걸로 치고 넘어간다. 매번 그렇게 넘어간다.
2019년 8월 29일 목요일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들판
어렸을 땐 고독과 슬픔에 대한 남모를 호기심이 있었다. 나이가 들며 불현듯 생각만
해도 가슴이 얼얼한 그런 기억들이 이따금씩 찾아왔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던 하루하루를 다시 무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도 결국
다시 무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그저 발에 닿는 감촉만으로 내가 앞으로 가고있다고 인지 할 뿐, 스쳐가는 바람 한점 느껴지지 않는 이 곳에서 그저 묵묵히 고통을 견디어 낸다.
인간은 나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어째서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셨나요. 누군가 그랬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맞다. 따라서 즐겁게 살기 위해,
고통을 줄이기 위해 또다른 고통을 견디며 산다. 고통 끝에 잠시 행복이 찾아왔지만, 그 행복은 더 큰 고통을 남기고 떠나간다. 행복이 떠난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너른 광야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해보이는 듯 하다. 바로 여기서 실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우린 누구이며 대체 무엇때문에
이런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가. 목적론에 입각한 이러한 생각은 결론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어리석고 나약하기 때문에 지혜롭고 강인한 것, 바로 목적과 타당성에 손쉽게 이끌린다. 또 그것에 유혹당한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인생의 결론에 다다른다. 수조의 인간들은
무상하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갔다. 그것을 잘 아는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은 다시 글을 쓴다. 현실의 고통과 그것의 타당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 결국 글은 아무것도 이뤄 주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한 줄로 주욱
늘여 쓴 글은 행복이 떠나간 너른 광야를 벗어나려는 어리석은 자의 발자국과 같다. 결국 고통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어렸을 적 느끼지 못했던 실존의 고민은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실마리 삼아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깊어지는 내면에는 썩은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 냄새가 역겨웠지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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